지난주 노자 해설에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격려를 주셨다.
사실 도덕경은 읽기가 어렵지 않다.
원문을 직역한 글은 30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으며 본문 대부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내용이 비유라는 것을 감안하고 읽게 되면 결코 쉽지 않다.
노자의 극히 일부분이라도 이 비유를 쉽게 읽을 수있게 만드는 것이 내가 할 일인듯하다.
나만의 독자적인 의견을 내는 것은 무리이고 그동안 여러 작가들의 해설서를 읽어왔으니
그들 중 공감가는 부분들을 바탕으로 앞으로 몇 편 글을 써볼 생각이다.
도덕경이 위대한 작품이라는 것은 책의 내용이 거의 비유를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비유라는 것은 때때로 원문에 쓰인 그대로 이해해도 별 무리가 없기 때문에 혼란이 일어난다.
원문을 그대로 이해하면 평범한 말 같은데 비유로 보고 풀이를 하게 되면서 길이 갈라지기 시직 한다.
도올이 여자가 표현된 몇 부분을 잘 못 해석했는지 일부러 관심을 끌려고했는지 여자 생식기로 표현해서
비난도 세게 받았었다.
.우선 도덕경 중에서 일반에게 가장 알려진 문장 上善若水(상선약수)를 보자.
상선=물 .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노자는 침이 마르도록 물의 덕을 칭송한다.
남들은 강한 것을 사랑하지만, 노자는 유연한 것을 사랑한다.
남들은 단단한 것을 사랑하지만, 노자는 부드러운 것을 사랑한다.
물이란 일정한 형태가 없이 유연하게 상황에 따라 모습을 바꿀 수 있으며, 자기를 비우고 고집을 내세우지 않으며,
높은 곳을 싫어하고 낮은 곳으로 흐르려 한다.
노자는 물의 이러한 모습에서 도를 보았다. 그래서 노자는 물에 대해 '道에 가깝다'라고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해설자들도 이 구절은 그렇게 해설하는데 도덕경이 병법서라고 주장하는 임건순은 다르게 해석한다.
그의 해설을 보자.
<노자는 물을 통해 용병의 원칙, 싸움의 덕목을 말하고 있습니다.
손자는 兵形象水를 말했습니다. 이는 제자백가 시대 텍스트에 나온 물에 대한 담론 중에 노자의 上善若水와
가장 유사한 말입니다.
그 도라는게 물과 가까우니 싸울 때는 물 같아야 하고 물처럼 움직여야 하지요. 변화해야 합니다.
유연하게 고정된 나로 싸우면 안 됩니다.
전쟁터의 상황은 항상 변하지요. 날씨와 지형, 적군과 아군의 심리, 국제적인 정치 환경 모두 변하는 만큼
그에 맞춰 자신도 변해야 합니다. 신축적이어야 합니다.
항상 능숙히 변해야 이긴다! 이런 대원칙은 병법에서 꼭 명심해야 할 사항인데, 노자가 물을 가지고 강조한 것입니다>
비유에 대한 오쇼의 설명이다.
<비유란 알려지지 않은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알려진 것을 참고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유는 언제나 가득 채워져 있다. 논리는 항상 좁지만, 비유는 넓고 무한하다.
그대가 그 안에서 추구하면 할수록 그대는 더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논리는 소모적이지만 비유는 결코 그렇지 않다.
그래서 그대는 도덕경이나 바가바드기타, 또는 예수의 산상수훈 같은 것을 읽고 또 읽고 또 읽을 수 있다.
그것들은 고갈될 줄 모른다. 그것들은 모두 비유이기 때문에 그대는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대가 성장하면 할수록 그 안에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더 많은 것을 보면 볼수록 그대는 더 성장한다.
그대가 더 성장하면 또다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비유는 그대의 마음 상태가 변화할 때, 또 다른 시각을 준다.>
우리가 노자를 읽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노자가 우리에게 한두마디씩 던지는 말속에 인생의 심오한 지혜가 들어 있다.
그는 평범한 것들을 예로 들며 평범한 말투로 말하지만, 그 안에는 비범한 것들이 들어 있는 것이다.
모든 현자들과 마찬가지로, 노자는 우리에게 인생의 해답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나는 지난 글에서 도덕경에 수많은 해설이 난무한다고했다. 비유 때문에 그렇다.
기독교나 기타 종교에서 이단이라고 서로 비난 하는것도 비유에 대한 해석차일 경우가 많다.
예수의 말씀중에는 비유를 또 비유한 말도 있다고 한다. 어찌 쉽게 이해하겠는가?
여기서 <도덕경>의 비유에 관련된 한 가지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자. 차경남의 글이다.
<<도덕경> 5,000자를 아무리 뜯어봐도 단 한 개의 '고유명사'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인류의 종교철학사 전체를 통틀어 유일무이한 일이다!
<도덕경>에는 다른 종교의 경전을 펼치면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그 흔한 사람 이름 하나(人間),
나라나 도시 이름 하나(空間), 어떤 시간과 때에 관한 언급(時間) 따위가 전무하다.
《도덕경>을 해설했던 여러 주석가들이 이점을 지적했다시피 [특히, 노태준의 지적이 예리함],
하나의 철학서적 안에 어떤 고유명사도 들어있지 않다는 사실은 우선 그 자체로 놀라울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매우 중대한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노자는 우연히 고유명사를 뺀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고유명사 일체를 자신의 책에서 배제시킨 것이다.
고유명사란 무엇인가? “고유명사란 시간(역사)과 공간(풍토)에 제약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존재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한다면, 어떤 책에 고유명사가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는 사실은, 그것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하고도
보편적인 진리를 지향하는 저작" (이상, 노태준)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노자는 자신의 저작에서 특정 시간과 공간을 제거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는 나라와 민족, 역사와 풍토 따위를 초월한 보편적 道를 수립할 수 있었다.
이점이 노자가 다른 제자백가들과 다른 점이며(이점에서만은 장자조차도 노자와 확연히 구별된다),
나아가 이 지구상 어떤 철학자와도 다른 점이다.
기독교의 《성경》을 보자., 《구약》은 상당수가 거의 역사책이다.
역사라는 것은 주체가 하나의 국가나 민족일 수밖에 없다. 국가와 민족이 진리를 기술하기 시작하면 위험해진다.
역사성 내지는 역사철학이 강조되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보편성 내지는 보편철학의 왜곡을 가져온다.
역사는 본질적으로 정치투쟁적인 것이며 흑백논리적인 것이다.
내편과 남의 편, 승자와 패자가 엄연한 현실역사에서 선과 악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다.
어떻게 남의 편이 선일 수 있겠는가? 어떻게 내 편이 악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신약》중 예수가 직접하신 말씀에는 구체적인 고유명사가 없다.
예수외의 다른 인물들의 문장에 그런 고유명사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역사 혹은 역사철학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보편적이며 절대적인 진리를
결코 자신 안에 담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요컨대, 역사공부를 하면서 진리 운운 하는 것은 실로 위험천만한 일이다.
만약 道를 나라와 민족의 관점에서 기술하기 시작하면, 그 도는 당장에 왜곡되며 변질되고 만다.
성경을 읽어보면 구약의 야훼와 예수가 언급한 하나님은 여러모로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이 점은 현재 중동에서 벌어지고있는 전쟁에 대해서 유대교인들은 지금 사태의 전개가 야훼의 뜻과 일치한다고
할지 모르나, 기독교인들이 예수가 이야기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할 것 같다.
순전히 개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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