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1월부터 블로그를 시작했는데 노자의 "도덕경'에 대해서 나도 글을 좀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처음에는 쭉쭉 써내려갈 줄 알았는데 몇 편 올리다보니 자꾸 더 어려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도덕경 해설서를 7-8권은 정독을 했는데도 그랬다. 그러는 사이 가벼운 글을 계속 만들어 내어 블로그를 채워 나가고 있는데 아무래도 다시 노자도 병행해야할 것 같아서 노자에 관한 글은 "티스토리"에 올리기로헀다.
도덕경 해설서를 쓴 작가들은 전부 만만한 분들이 아니다. 엄청난 노고가 들어갔다는 걸 읽으면서 느낄수 있다.
이에 반해 블로그류의 짧은 글로 도배되고있는 인터넷상의 노자 단상은 거의 대부분 무언가 많이 빠진듯한 느낌을 준다.
대부분 그냥 여기저기서 베낀 것을 나열한다.
대개 도덕경 81개 항목중 1개나 3-4가지 항목을 떼어내서 쓴 것을 보게된다.
"명심보감' 이나 "채근담"은 하나의 주제를 그대로 해석해서 그냥 올려도 아무런 무리가 없어보이는데 '도덕경'은 무엇인가 서로 연결되어있는 듯한 기운이 있어서 한 장만 설명할 때는 개운치않은 느낌이다.
'도덕경'은 경전 중에서도 가장 짧은 5,00여자밖에 안되지만 정말 많은 것을 담고있다는 것을 계속 느끼고 있다. 나도 도덕경해설서 작가들처럼 남들과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짧은 글을 쓰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된다.
우선 나의 관점에서 본 각 해설자들의 특이한 점을 써보는 것으로 노자쓰기를 시작해보기로 한다.
1. 오쇼 라즈니쉬
모든 해설자들이 어려워하는 노자에 대해서 가장 자신만만한 사람은 오쇼 라즈니쉬이다.
"나는 노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어떻게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겠는가? 내가 노자에 대해서 말할 때, 나는 마치 나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한다. 나의 존재는 그와 완전히 하나다. 내가 노자에 대해서 말할 때, 그것은 마치 내가 거울을 통해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내가 노자에 대해서 말할 때, 나는 완전히 그와 함께 있다.
완전히 그와 함께 있다고 하는 말도 맞는 말은 아니다. 내가 바로 노자이며 그가 바로 나다!"
그는 설명을 쉽고도 자세하게 해준다. 그의 해설서는 작은 글씨로 6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나 81개 장중 20장만
다루었다. 나머지 61장을 다루지 않은것이 아쉽다.
나는 그의 책을 읽으면서 '도덕경'이 쉬울 것으로 판단했으나 결국 그렇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노자가 되거나, 노자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사실, 그대가 노자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대는 이미 노자이다.
붓다를 알아보기 위해서 꼭 붓다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노자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대 스스로 노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2. 이경숙
도올의 '도덕경' 해설을 거의 쓰레기로 몰아부친 이 분의 해설서는 거의 800페이지에 달한다.
엄청난 분량인데도 차분하게 자신의 주장을 펴는데 상당히 끌려든다. 한문 실력도 상당하고 설득력도 가지고있다.
학자들 사이에는 다른 사람의 도덕경 한자 풀이가 잘 못되었다는 비난을 많이 볼 수 있는데 그녀는 고대 한자에 대한
해석학이 시작된 것이 중국에서도 100 여년에 불과하므로 우리나라 학자라해서 그들에게 꿀릴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그녀는 한자를 눈으로만 보지말고 써 볼 것을 주문한다.
<고전의 번역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이유는 번역자나 학자들이 눈으로 읽고 머리로 뜻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전은 손으로 읽고 마음으로 뜻을 얻어야 한다. 문법 따위는 몰라도 상관없다.
문법이니 용례니 하는 것은 과감하게 버려라. 그래야 고전에서 옛 성현의 향기를 맡을 수있고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영어를 10년이나 배우고도 미국 사람과 말 한마디 못하는 교육의 폐습이 한문과 고전 교육에도 똑같이 스며 있다. >
3. 웨인 다이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웨인 다이어는 거의 600페이지에 달하는 해설서를 쓰기 위해 꼬박 1년을 여기에 매달렸다고 한다. 서양사람의 관점에서 깊이 파고 들어간 가치있는 책이다.
그의 다른 책 곳곳에서 동양철학의 냄새가 짙게 드리워진다. 그렇지만 서양인의 관점에서 썼기때문에 몇가지 의문점도
남기는데 이런 차이점도 자신이 설명해주고 있다.
내가 이질감을 느꼈던 부분은 웨인 다이어는 머리속으로만 한 번 생각한 뒤 지나치지 말고 명상이나 행동으로 실행하라는 서양식의 관점을 제공하는데, 노자의 사상에 흐르는 큰 줄기는 "무위(無爲, Let it be, Let it go)" 아니던가?
< '도덕경'의 첫 번째 장에서 노자는 우리에게 “도는 이름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라고 말한다.
서구적 사고로 볼 때 이 말은 명백히 모순이다. 실제로도 이 말은 모순이다. 이러한 모순적인 생각은 음양陰陽 사상이나
여성성과 남성성, 그리고 사물의 '이것'과 '저것'을 동시에 묘사할 수 있는 동양적인 사고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반면 서양 사람들은 이런 반대되는 개념들을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
그 밖에도 수 많은 해설서가 있다. 모든 저자들이 남이 쓴 해설본에 만족하지 못하여서 자신들의 관점을 발표하였다고도 볼 수 있는데 시로 쉽게 풀어쓴 해설서들도 있으니 그런 책들을 읽는것도 도움이 많이 되리라 생각한다.
나머지 책들을 뭉퉁그려 언급하자면 . '도덕경'이 원시 공산주의의 개념을 열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분이 있는가하면, 신비주의 신선사상인 도교의 실질적 계승자라고 주장하는 분도 계시고, 도덕경 자체를 병법서러고 주장하며 손자의 사상을 그대로 옮겨왔으므로 손자의 사상적 제자라는 분, 법가 한비자와 같은 계열이라는 분, 장자가 훨씬 폭이 넓고 노자는 장자의 사상을 이어받은 것일 뿐이라고 노자를 깍아내리는 분, 이 책에서 계속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한다는 분등 나열하자면 끝을 모를 정도이다.
그럼 무엇이 각각의 해설자들을 이렇게 분열 시켰는가? 이 답은 내가 그저 간단히 내 식으로 생각한 것을 적어본다.
심마니들이 산삼 컈러 산에 올라가서 정말로 오래된 산삼을 발견하였을 때 "심봤다"라고 소리치며 커다란 희열을 느낀다고 한다. 그 자신 엄청난 것을 발견했지만 온 산에 그 만한 산삼이 더이상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도덕경을 연구하다 어느 순간 여태 남들이 생각하지못했던 관점을 발견했다고 느낄 때, 그의 '도덕경'에 대한 관점은
'도덕경' 전체가 그가 발견한 주제속으로 함몰될 우려가 있다. 그러니 위에 열거한 강한 주장들이 나오는게 아닐까?
성경은 내용이 워낙 방대하니까 수많은 해석상의 문제가 나오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5,000여자에 불과한 도덕경에 이같이 다양한 주장들이 만개하는 것을 보면 이 책이 대단한 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이 5,000자에 실었다면 과장일까?
마지막으로 김기태의 해설을 소개한다.
도덕경은 결코 공허한 도道와 덕(德)을 말하는 책이 아니다. 도덕경이 말하는 모든 것은 이 평범한 우리네 삶과 일상과
지금 이대로의 우리 자신을 떠나 있지 않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네 삶과 일상과 우리 자신이 바로 도이다.
그렇듯 진리는 언제나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 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에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하여 바로 이런 얘기들을 나누고 싶은 것이다.
따라서 나는 도덕경을 해설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네 삶을 통하여 도덕경을 거꾸로 읽어 내었고, 그것이 바로 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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