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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수필 - 14 : 나의 군대 생활(1977-79) 1.

2024년에 '참군인 장태완 장군'이라는 글을 써서 올렸는데 그분으로 인한 부대 안의 변화를 주로 기록했었다.
이제는 당시 군대가 나에게 끼친 영향을 중심으로 일기형식으로 기록을 남기려고 한다.  1977년에 군대를 갔으니 거의 5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렇다 보니 어떤 사건은 기억에서 사라진 것도 있고, 또 다른 것은 아리송한 것도 있다. 

 

당시의 사건이 가끔 왜곡되어 생각나기도 하므로 더 늦기 전에 기록으로 남겨보는 것도 의미 있는 것 같다. 더구나 지금의 군대와는 전혀 다른 군 생활을 했으므로 세월이 더 지난 후에 보면 이 일기가 더욱 새로워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만일 그때 군대를 장교가 아닌 사병으로 갔다왔다면 내 성격이나 행동도 지금과는 조금 달라져있지 않을까 생각도 한다. 사병으로 갔다 왔으면 지금보다는 훨씬 부지런한 성격의 사람이 되어서 제대했을 것이며 우리 마님에게 지금보다 훨씬 더 사랑받는 존재로 되어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군대 상항과는 전혀 다른 예전의 군대 상황이니 감안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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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게으른 성격인 나는 대학 2학년 초 징병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군대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던 나는 신체 검사장에서 보조 일을 하던 방위병들이 신체검사 대상자들을 함부로 대하는 태도를 보니 내 성격에 군대에 사병으로 가면 무척 고달픈 상황이 펼쳐질 게 뻔해 보였다. 그래서 일단 대학 졸업 후 장교로 갈 수 있는 길을 찾기로 하고 입영연기서를 제출했다. 다행히 학군장교에 합격이 되어 졸업 후 단기복무 장교로 복무할 수 있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하여 광주보병학교에서 16주간 군사교육훈련을 받았는데 그때 16주동안 같은 방을 함께 쓰던 13명의 동기들은 비록 4달이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끈끈한 정이 생겨서 각자의 임지에서 병역을 마친 후 사회에 복귀해서도 멀리 지방에 있는 동기 몇 명을 빼면 지금도 일 년에 4번씩 만나고 있다. 비록 16주 동안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어려움을 같이 하다 보니  일생의 친구들이 된 것이다.>

 군에 대한 사전 지식이 거의 없었던 나는 그 당시 줄을 잘서면 군 생활을 조금 편하게 할 수 있다는 그런 내용도 전혀 몰랐다. 지방에서 대학을 나온 나는 정말로 정보가 어두워서 어문학 전공자인 나로서는 당연히 합격해야 하는 통역장교 시험에도 합격하지 못했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지방 환경이었다. 정보전달이 서울에 비해서 엄청 늦었다.

 

통역장교 시험이란 것 자체가 있는지도 몰랐던 나는 시험 전날 내일 시험이 있다고 갑자기 통보가 와서 별거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시험장에 나갔는데 지금 기억하기에는 시험문제 수준은 중학교 2, 3학년 정도의 영어 문제가 나왔는데 문제는 대부분 군대 용어(말하자면, 소대장, 중대장, 군단. 중대. 대대. 분대, 소대 등)를 영어로 쓰라는 문제들이었다. 일반적인 회화문제가 나올 걸로 예상했던 나는 그런 단어를 하나도 번역하지 못했다. 


누구도 나에게 그런 식으로 문제가 나온다고 이야기해주지 않은 것이었는데 제대후 한참이 지난 후에 학교 선후배 회식자리에서 문제 출제에 당시 육본에 근무하던 직속 선배들이 참여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분들의 이야기가 후배가 시험 보는 줄 알았으면 최소한 군대 용어가 주로 나온다는 것을 알려주었을 텐데 하며 아쉬워하셨다. 통신이 자유롭지 않았던 나의 대학 시절에는 그분들을 찾을 생각도 못했다.

그렇게 해서  당시에는 근무하기 무척 힘들다고 알려진 그야말로 복무기간 2년 내내 정신없이 뺑뺑이 도는 전방예비사단 소대장이 되었다. 차라리 특수부대나 최전방에  있었으면 업무 시간 외에 자유시간을 충분하게 누릴 수 있었겠지만, 군단의 예비사단인 우리 사단의 보병은 밤낮없이 훈련하고 출동대기하고, 수시로 한 밤중에 비상 걸리고, 한마디로 자유시간이 거의 없었다.  

 

차분하게 책을 읽을 시간은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틈이 나면 부족한 잠을 보충하기 바뻤다. 줄을 잘 섰던 동기들은 제대 6개월 전부터 전역 후의 취업문제로 외출을 수시로 할 수 있었다는데 나의 제대 연차에 우리 중대에서 4명 소대장 중 , 육사. 삼사출신 소대장들이 두 명이나 한꺼번에 빠져나가고 보충이 되지 않아서 전역 신고 때까지 부대에 잡혀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단장이 바뀌고 나서는 100키로 행군이나 10킬로 무장구보 같은 육체적으로 힘든 과제들은 없어졌는데 대신 실전훈련 강화라는 지시가 내려와 훈련 나갈 때마다 실탄 박스는 물론이고 지뢰 및 크레모어까지 가지고 나가라 하니 소대장들이 신경 쓸 일이 많아졌다.

최전방도 아니고 민가가 들어서 있는 지역을 그런 위험 무기류를 지참하고 야간에도 수시로 출동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각 소대가 돌아가며 민가 근처 야산에서 지뢰나 크레모어를 전개하고 하룻밤 숙영을 해야 했다. 소대원들이 크레모어 같은 것 잘못 건드리다가 사고라도 나는 날에는 인생 조지겠다 싶어서 그런 날에는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월남전 참전을 했던 선임하사에게 맡겨도 되었겠지만 생사를 넘나들던 경험을 했던 선임하사는 지뢰나 크레모어에 전혀 신경을 쓰지않아서 내가 챙길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심정은 말년에 서울에 나가서 취직자리도 알아보고 해야하는데 사고라도 나면 제때 제대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전역 후에 취직을 생각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아마도 이 훈련은 내가 제대하고 나서는 없어졌을 것 같다.

당시는 대졸자가 지금처럼 많지않았던 시절인데 대학 다니다가 사병으로 군대 온 친구들은 대부분 전방부대에 배치되었고 우리 부대에는 대학물 먹어본 친구들이  몇 명 되지 않았다.  의정부 부근 양주에 위치했었는데 부대 위치상 서울로 나가기가 쉽기 때문에  병사들을 편하게 놓아두면 탈영하는 친구들이 늘어나기 때문에 뺑뺑이를 돌린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실제로 나도 우리 소대에 탈영병이 생겨서 그를 잡으러 그의 마산 집까지 찾아갔던 적도 있다, 부대근무 시작하며 선임하사들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당시 사단장인 장태완소장이 오기 전까지는 상당히 근무하기 편한 부대였는데 장소장이 온 후로 갑자기 엄청 빡세졌다고 한다.
쓰다 보니 잊어버리고 있었던 사건들도 계속 기억이 나서 앞으로 몇 편 더 연속해서 쓰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