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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수필 - 5 : 독서 DNA



 

자식이나 손자를 보면서 얼굴 생김새나 성질등이 나와 우리 마님, 나의 부모, 더 넓혀서 장인 장모의 어떤 부분을 닮았구나 하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당연히 좋은 성질은 후손 대대로 내려가고 나쁜 습관이나 버릇은 끊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때때로 세대를 건너뛰어 나타나는 유전인자도 있어서 깜짝 놀라기도 한다.

 

오래전에 작고하신 나의 부친은 선생이셨다. 가족생계를 선생 봉급으로 꾸려 오셨다.

부친은 술은 몸에서 받지 않아 전혀 술을 못 드셨으나 담배는 하루 2갑 정도 피우는 골초이셨다. 별다른 취미가 없으셨는데 확실한 취미 하나는 책을 사모으는 것이었다.

영어 선생이셨는데 수시로 일본에서 발간된 영어 문제집과 영문법 관련 책들을 사모으셨다.  어머니 말씀이 매달 봉급 가져올 때  외상책값 및 외상물품값을 갚고 나머지를 어머니께 준다고 했다. 외상값은 아마 거의 책값이었을 것이다.  

 

부친은 병이 깊어지기 전까지는 매일 책을 펴고 공부를 하셨으나 구입해 놓은 책의 1/10 정도나 읽으셨는지 모르겠다.  소설책같이 쭉쭉 읽어나갈 수 있는 책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각 대학입시 영어시험 문제들 뿐만 아니라 시중의 유명영어 창고서들도 일본 문제집에서 많이 베낀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러나 부친은 집안일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심하셔서 모친과 여러 번 다투셨으나 가장 권위가 살아있던 시절이라서 그 다툼은 항상 오래가지 못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내가 중학교 1학년때 옆 동내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부친은 그냥 출근하시고 어머니 혼자 이삿짐 일꾼들과 짐을 옮겼는데 성격이 꼼꼼하신 어머니는 어디로 이사 간다고 주소와 약도를 잘 작성해서 부친께 주었는데 부친은 그 메모를 잊어버렸는지 저녁때 이사 간 우리 집을 찾지 못해 동네를 여기저기 헤매느라고 두 시간이나 길에서 허비했다고 한다.  아마 그때 집에 전화가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집안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으셨다.

 그날 집에 들어오시자마자 혹시 책이 상하거나 분실된 것이 없는지 책부터 챙기시는 것이었다. 

 

집안일에 대한 부친의 무관심은 몸이 아주 약하셨던 모친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준 것을 어렸던 나도 잘 알고 있어서 나는 나중에 결혼하면 아버지처럼은 안 하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결과는 딴판이다. 언젠가 마님이 며느리에게 "네 시아버지(나)는 설거지지도  전혀 하려 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하고 며느리가 "정말이에요? 남편(내 아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하며 크게 놀란다. 물론 마님의 과장이 심한 것도 있겠지만 나는 부친보다 몇 배는 더 집안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이야기가 고부간에 오가는 것을 보면 나는 아니라고 극구 부인해도 부친의 그런 성향을 어느 정도 물려받은 것 같다.

 

나와 내 남동생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부친의 책 사는 버릇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사놓은 책을 전부 읽을 시간이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나는 책 사는 것을 최대한 자제했으나  그래도 동료들보다는 많이 사둔 것 같다. 

 

나 자신은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부친이  내가 읽을 책을 계속 사 오셔서 책을 무척 많이 읽었으나 중학교 시험 준비를 해야 하는 국민학교 고학년 때부터는 책을 읽지 않았는데  사춘기가 온 중3 때부터 고1 때까지 2년 동안 많은 국내외 명작 소설들을 다시 읽게 되었다. 이것도 대입 준비를 해야 하는 고2 때부터 읽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사춘기 때  읽었던 문학작품들이 꽤 오래 기억 속에 남아서 나의 인격형성에 많은 도움을 준 것 같다. 

이때 끊어진. 독서습관은 코로나 사태 시작으로 가급적 외출을 삼가던 와중에 우연히 찾아왔다.  심심해서  예전에 친구에게 선물 받은 책을 읽는도중 갑자기 책 내용에 빠져들었는데 이것이 잠재의식 속에 숨어있던 독서 본능을 깨워  그동안 밀렸던 책들을 지금도 계속 읽고 있는 중이다.

 

아들이 직장 생활을 시작할 때 아비로서 한마디 조언해 준 것이 '나중에 회사의 중역이 된다면 젊었을 때 읽은 책들이 많은 도움이 될 테니 짬짬이 교양서적을 많이 읽어라'라는 것이었는데 나 자신 아들이 커오는 동안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그런 충고를 하니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아들은 책을 멀리하고 시간 나는 대로 각종 운동에 매진해 왔다. 

손주가 생기고 나서는 '독서하지 않는 아빠를 두었으니 책 읽는 우리 집 가풍은 없어지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손주가 한글을 깨치기 전부터 책을 끼고 사는 것이다. 며느리가 곤충도감을 사주면 수백백 개의 곤충 이름을 술술 외우고 공룡 도감을 사주면 역시 몇백 개의 공룡 이름을 그림만 보고 척척 외우는 것이다. 물론 한글 깨치기 전이니 며느리가 옆에서 불러주는 이름을 그냥 외운 것이다.  

 

휴일 아들 집에 가보면 아들 부부는 TV야구 중계방송을 보고 있는데 손자는 자기 방에서 그림책을  보고 있거나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손자는 커가면서도 계속 책을 읽어왔고  그동안 우리 집에 올 때는 항상 읽을 책을 가지고 왔었다

요새는 책대신  계속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독서 버릇이 바뀔까 봐 속으로 걱정되기는 한다. 

그러나 지 아비나 할아버지(나)가 애가 어릴 때 독서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는데 책 읽는 습관이 붙은 것은 증조할아버지의 유전인자가 두 세대를 건너뛰어 손주에게 내려온 것 같아서 흐뭇하기만 하다. 

이 현상을 유식한 말로 “격세유전’이라 부른다는 것을 근래 알게 되었다.

 

물론 며느리의. 실제적인 뒤받침이. 컸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내 부친이 나에게 그러했듯이  며느리가 손주에게 계속 읽을 책을 사주었던 것이다. 

독서 습관은 우리 집안의  좋은 가풍이기도 하니 아들도 나처럼  나이가 들어서라도 책을 읽었으면 좋겠고 이 좋은 버릇이 계속  후대로  내려가기를 소망하고 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다가오는 것은 당연하다. 책을 읽는 습관이 그럴 때  어려움에서  건져내 주는 계기도 만들어주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